65. 시간과 기억은 압축되어 덩어리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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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말한다. 시간은 사건이 일어난 순서일 뿐,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고 사람의 운동 속도에 따라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고. 상대성 이론 개념은 물리 세계에서만 작동하는 게 아니다. 시간과 기억을 조작하는 정신세계에서도 작동한다. 시간은 앞에서 보면 몸집을 늘려 나에게 달려드는 뱀처럼 보인다. 뒤에서 보면 꽈리를 튼 뱀이나 바닥에 남겨진 허물처럼 보인다. 결국 뒤돌아보면 별거 아닌, 그런 시간을 남기며 살아간다. 그런 시간 동안 어떤 사건이 일어났던 간에 사람은 지난 시간을 삼분법으로 분류해 기억한다. 매우 좋음, 보통, 매우 나쁨. 이곳저곳에서 나에게 일어난 일들이 결국 삼분법에 따라 덩어리질 거다. 에이, 곧 덩어리 질 순간인데, 생각하면 어째 모든 일이 다소 가볍고 즐길 만한 것이 된다. 덩어리의 몸집이 작을수록 순간에 얽매이게 된다. 그래서 매 순간 일어나는 일을 분류하는 것보다 그저 곧 만들어질 덩어리가 ‘매우 좋음’으로 분류되기만을 목적으로 삼으려고 한다. 그럼 꽤 만족스러운 삶이 될 것 같다. 그럼 꽤 자유로워질 것만 같다.



2.

저 먼 나라 사람은 어떻게 삶을 사나, 직접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도전한 해외 생활은 나에게 어떤 덩어리로 남았나. 다행히 ’매우 좋은‘ 기억이다. 좋은 기억은 그대로 남겼다. 빵과 버터, 치즈와 커피나 차를 마시던 평일 아침, 햇빛과 바람을 맞으며 항구 데크에 앉아 멍때리거나 밀린 글을 쓰던 평일 오후, 펍에서 친구와 맥주를 마시던 평일 밤, 또는 친구와 브런치 카페에 갔던 주말 아침, 비치 타월만 들고 슬리퍼 직직 끌며 집 근처 해변으로 걸어갔던 주말 오후, 1 퍼센트 가능성을 가진 오로라를 보겠다고 자전거 타고 북쪽 해변가로 간 주말 밤, 그런 일상적이고 지루하고 헛웃음 나는 순간 말이다. 반면에 나쁜 기억은 의도적으로 지우고 그에서 파생된 것 중 필요한 것만 남겼다. 의사소통이 편하게 되지 않아 상황에서 소외되는 기분이 들던 순간 말고 상황에 몰입해 진심으로 즐겁게 소통할 수 있었던 순간이나,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던 순간 말고 적어도 무슨 역할을 하곤 있구나 안심했던 순간 말이다.



3.

그래서 ’매우 좋다’고 남은 기억에서 무엇을 얻었느냐고 묻는다. 난 이제 자전거를 탈 수 있다. 한 손으로도 탈 수 있고, 두 손을 놓고도 2초 동안 휘청거리지 않을 수 있다. 자전거 탈 수 있게 된 일이 별거야 싶지만서도, 내가 무서워했던 일 중 하나였기에 실제로 나에겐 꽤 별거였다. 나에게 또 별거가 된 게 있다. 내가 지금까지 이런 걸 해왔으니, 나중엔 그렇게 살아야겠지, 누구나 별 거라고 생각하는 별 것이 되어야겠지, 라고 무심코 의식했던 것을 버렸다. 어떻게 살면 좋을 것 같고, 성공이라 할 수 있겠다고 상상하며 진실된 별 거가 되길 바라기 시작했다. 덕분에 머리는 정리 안 된 생각으로 더 복잡해졌으나 적어도 이유 모를 불행이나 행복을 만드는 일이 줄었다.



4.

잠시 밖에서 머무는 동안 이렇게 남은 흔적이 좋다. 여행하며 남은 흔적보다 더 좋다. 여행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시간으로만 채워진다. 반면에 일을 하고 거주하기 위해서는 해보고 싶은 일을 위해 견뎌야 하는 일을 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러니 균형 잡는 연습을 조금 더 해야 하고, 여행과는 다른 흔적을 가진다. 비록 어떤 흔적이 남았고 어떤 점이 다른지 명확하게 상상하고 설명할 수 없을지라도. 여행이 남긴 흔적보다 잠시 머물며 얻은 흔적이 더 진실하고 짙어 보인다.



5.

이제 다른 글로 다음을 이어가야 한다. 다음 이야기와 기억 덩어리로 다음을 이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