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가방 두 개 들고 국경 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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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국 비행기 시간에 맞춰 아침에 나갈 준비를 마쳤다. 선잠을 잤는지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짐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 자물쇠를 단단히 잠갔다. 각자의 하루를 또 살아야 해서 출근 준비하는 가족과 떠나기 전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집에서 나와 엄마와 함께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떠났다. 공항으로 향하는 30분은 택시 기사님과 엄마의 대화로 잔잔히 채워졌다. 기사님 자녀분도 해외 생활을 하고 있다면서 말꼬가 트여 꽤 긴 대화가 이어졌다. 공통 주제와 관심사가 있다는 건 예상치 못한 인연과 즐거움을 만들어 주곤 한다. 공항으로 향하는 길은 빠삭하게 아는 기사님은 출근 시간에도 밀리지 않는 도로를 골라 달렸다. 덕분에 출국 시간보다 2시간 반 정도 일찍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2.

 

도로에서 택시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내리는 사람들, 캐리어를 끌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 이른 시간에도 바쁘게 터미널 안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유난히 차가운 아침 공기와 매연 냄새를 맡고 나서야 공항에 온 걸 실감하게 된다. 위탁수하물 체크인을 하기 전 환전 신청한 돈을 찾고 캐리어 무게를 재보았다. 집 체중계와 공항 저울과 무게 측정값이 항상 다르게 나온다는 걸 알았는데도, 무려 2킬로 그램 정도 초과한 수하물 무게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 여유 무게가 남을까 봐 더 챙겨온 짐들을 더 챙겨가기는커녕 짐을 다 빼내야 했다. 이미 집에서도 무게 맞추느라 3번은 반복한 짐 싸기였는데도 말이다. 캐리어 하나와 백팩 하나만 들고 떠난다는 게 사람을 미니멀리스트로 만드는가 싶었다. 카메라 필름도 몇 개 빼고, 캐리어 안에 있던 두꺼운 재킷은 몸에 걸치고, 책과 작은 물품은 백팩 안에 눌러 넣고 손에 들었다. 하나라도 더 못 챙겨 간다는 사실에 슬퍼하다가, 공항 직원에게 작은 물품은 손에 들고 공항 수속해도 된다는 확인을 받고 몇 개 더 챙겨갈 수 있었다.
 

캐리어에서 쫓겨난 물건들
비행기 탑승 준비




3.

 

위탁 수하물 체크인할 때는 귀국 비행기표가 없다는 이유로 각종 서류를 보여주면서 오래 머물 거라는 사실을 증명했어야 했다. 덴마크는 90일 이내 무비자 체류가 가능한 곳인데, 그 기간 내에 떠난다는 사실을 증명할 귀국 비행기표가 필요하다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공항 입국 심사에서 인터뷰가 있을 수도 있고, 귀국 비행기표를 예매해서 가는 것이 안전한 방법이라고 안내해 주셨다. 대신에 나는 공식 비자 신청 영수증과 인턴십 고용계약서로 합법적으로 장기체류가 가능한 상황이라는 걸 증명하고 나서야 체크인을 마칠 수 있었다. 승무원이 몇십 분 동안 문제 없이 입국이 가능한지 확인하는 동안 나는 입국하다가 문제 생기는 거 아니냐며 식은땀만 흘렸다. 다행히 체크인을 무사히 마치고 캐리어 보안검사를 기다리는 동안 엄마가 입에 넣어주는 과일을 먹으면서 할아버지께 안부 전화를 드렸다. 그리고 엄마와도 인사를 하고 입국장 안으로 들어갔다. 캐리어에 넣지 못한 짐을 몸에 다 지고 있으니까 보안검사 하는데도 챙길 게 많았다. 입국장 안에 들어가서는 수많은 면세점을 그냥 지나쳐 곧바로 게이트로 향했다. 체크인에서 시간을 많이 빼앗겨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없었다. 게이트 앞에 앉아서 한국 통신사와 로밍을 차단하고 나서야 멍때리며 탑승을 기다렸다. 내가 탑승할 비행기는 폴란드 항공편으로,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경유해 공항에서 2시간 정도 머물렀다가 다시 코펜하겐으로 향하는 노선이었다. 앞으로 17시간 가까이 꼼짝없이 비행기와 공항 안에 있어야 했다. 드디어 비행기에 탑승하고 필요한 물건만 가방에 담아 좌석 밑에 내려두고 곧바로 잠을 잤다. 영화도 보고 책도 읽겠다고 아이패드에 잔뜩 챙겨왔는데, 불편한 자리 때문에 몇십분 단위로 깨서 그런지 자도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아 잠만 내리 잤다. 아무래도 기내식 먹을 때만 제정신이었던 것 같다. 기내식은 이륙 후 2시간 후, 그리고 착륙 전 2시간 전에 나왔다. 첫 번째 기내식은 불고기 햄버거를 식혀서 고기패티만 빼먹는 맛이었고, 두 번째 기내식은 조금 짠 장조림 맛이었다. 그래도 먹기 좋은 기내식이었다. 특히 차가운 햄이랑 매쉬드 포테이토가 내 취향이었다.
 

날아가야 할 거리

 

 

 

 

 

 

 


4.

 

잠도 자고 밥도 먹고 열몇 시간을 날아 오후 5시쯤 폴란드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 승무원이 경고했던 출입국 심사 인터뷰는 다행히 없었고, 아무 문제 없이 입국 도장을 받고 공항 터미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수하물도 자동으로 옮겨지고, 환승 시간도 비교적 짧기 때문에 쉬다가 환승하면 되겠구나 싶었는데, 항상 위기는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다. 비행기 좌석 내 USB 포트가 고장 나서 핸드폰을 충전하지 못해 핸드폰 잔여 배터리엔 빨간불이 켜졌는데, 바르샤바 공항에 충전기 포트가 없는 거다. 수많은 의자를 다 살펴보며 다녀도 그 흔한 콘센트도, 충전기 포트도 없어 결국 아무 의자에 앉아 두 시간 동안 사람 구경이나 하면서 있었다. 탑승 시간쯤 되어서야 충전기 포트를 찾아 근처에 붙어 빨리 충전되길 바라다가 다음 비행기에 올라탔다. 바르샤바 공항에서 코펜하겐 공항까지는 3시간도 되지 않는 비행이었기에, 비행기 규모도 작고, 충전기 포트도 없었다. 비행 중간에 나눠주는 간식만 야금야금 먹으며 나는 또 얌전히 3시간을 날아가야 했다. 그렇게 도착한 코펜하겐은 밤 11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출국할 때만 해도 나를 땀 흘리게 했던 가죽 재킷은 코펜하겐에서는 내 추위를 막아준 든든한 놈이 되었다. 코펜하겐으로 온 한국 단체 관광객 틈에서 수하물을 먼저 찾아들고 출국장을 지나 터미널로 나갔다.

바르샤바 공항 도착
바르샤바 공항에서 환승
바르샤바 공항 표지판

 

 

 

5.


코펜하겐 기차와 지하철은 24시간 운영되지만, 야밤에 기차를 타고 저 멀리 다른 도시로 이동할 용기가 없던 나는 공항에서 몇 시간 노숙하기로 했다. 건축학과 4년 다니면서 야간작업할 때 건물 로비에서 소파에서 자던 게 이럴 때 도움 될 줄 누가 알았겠나. 내가 탈 기차는 새벽 5시쯤이었기에 그때까지만 의자에 누워서 쉬기로 했다. 캐리어가 크니까 발판으로 쓰기 좋았다. 사실 누가 훔쳐 갈까 봐 내 몸 아래 다 깔고 누웠다. 가족들은 도착했냐고 물어보는데, 나는 아직도 공항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기차를 타기 전 공항 세븐일레븐에서 레바라 유심칩을 사고 기차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코펜하겐 새벽 공기는 너무 차가워서 감기에 걸릴 것만 같았고, 사방에 널린 외국어와 한국과 다른 공기 냄새는 나를 설레게 했다.

 

코펜하겐 공항 도착
수하물 찾는 사람들로 가득찬 코펜하겐 공항
코펜하겐 공항에 드러누운 나


 

6.


오르후스로 넘어가기 전에, 코펜하겐 중앙역에서 내려 코펜하겐 시내를 잠깐 구경했다. 주말 이른 아침이었기에 어딜 구경할 수는 없었고, 중앙역부터 코펜하겐 강변 쪽으로 크게 돌아 산책했다. 처음으로 본 코펜하겐은 지나치게 조용하고 한적한, 고전적이면서 현대적인, 도시와 건물을 배경으로 운동하는 사람이 많은 도시였다. 건축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보이는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시간 정도 동네를 구경하고 나서 다시 중앙역으로 돌아가 맥도날드로 아침을 챙겨 먹었다. 그리고 또 핸드폰 충전할 곳을 찾아다녔다. 애증의 배터리. 결국 나는 또 빨간불 핸드폰을 들고 오르후스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탔다. 내가 앉은 기차 좌석은 너무 좋았다. 좌석도 넓고, 테이블도 있고, 기차칸 한쪽에 물과 간식거리도 있었고, 그리고 콘센트도 있었다. 창가 밖으로 보이는 넓은 들판을 보면서 편하게 갈 수 있었다. 너무 좋았다. 너무너무 좋아서 문제였다.
 

오르후스로 가는 기차 시간표
코펜하겐 공항 기차 플랫폼
아침 8시의 코펜하겐

 

 

 

7.


종착역을 확인하고 기차를 탔지만 아무래도 불안해서 가는 도중 구글 지도로 현재 위치를 확인했었다. 그런데 거의 도착시간이 다 되었는데, 거의 다 도착하기는커녕 기차는 오르후스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다. 나는 두 시간 뒤에 비자 발급을 위해 꼭 가야 하는 SIRI 예약이 있는데! 당황해서 에어팟 끼고 있는 앞에 사람을 붙잡고 오르후스 안 가냐고 물어보니까 안 간단다. 순간 진짜 망했다 싶었다. 오르후스 가야 하는데 어떡하냐고 물어보니, 본인 다음 역에서 내린다고, 거기서 환승하는 거 도와준다고, 같이 내리자고 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헤닝 역에서 내려 내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계단도 올라가 주고, 환승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까지 태워주고 쿨하게 떠난 친절한 분께 한 번 더 전해지지 않을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오르후스 가는 길 기차 안에서 본 들판

 

 

 

8.

 

예약 시간은 한 시간도 남지 않았는데, 헤닝에서 오르후스까지 가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SIRI에 전화해 상황을 설명하니, 일단 최대한 빨리 현장에 오는 게 좋겠다고 했다. 오르후스역에 도착하자마자 SIRI가 있는 Dokk1으로 향했다. 분명 Dokk1까지 가는 기차길, 도보 길이 다 예뻤던 거 같은데 볼 겨를도 없었다. 예약 시간으로 체크인하니 시간이 지나 업무를 처리할 수 없다는 번호표를 받았다. 직원한테 가서 말하니 너무 늦게 왔다고, 내 업무를 처리해 줄 수 없다는 소리만 들었다. 서류 검토라도 해달라는 요청도 거절당했다. SIRI 철창문이 닫히는 걸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허무한 순간이었다. 아마도 24시간 동안 씻지도 못한 내 모습이 더 꼬질꼬질하게 느껴졌다. 금요일 오후, 일찍 퇴근하고 거리에서 가족이나 친구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캐리어를 끌고 지나가는 시간이 더 길게 느껴졌다. 한국에서 출발해 여러 사건을 마주하며 24시간 그 이상이 지나 도착한 오르후스, 이렇게 내 덴마크 생활기는 시작되었다.

 

체크인 실패한 SI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