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외국어와 싸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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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어떤 기준을 만족할 만한 하루를 보내기엔 부족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현실을 피하지 못하고 맞닥트릴 때만큼 자신이 못나 보일 땐 없다. 하루하루 불편한 외국어로 산다는 게 그렇다. 부족한 외국어 실력으로 어떻게 집을 구하고 어떻게 사람을 사귀고 어떻게 일을 할까, 십분 고민하다가도 그래도 해야겠다고 다시금 자신감에 차길 반복하고. 처음 보는 사람과 외국어로 대화하는 게 편해질 때쯤이면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가 서로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더 깊은 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겠구나 싶을 때면 자신감은 또 수직 하강한다. 몇 번 대화의 성공과 실패의 반복으로 기쁨과 슬픔을 오고 가기엔 내 외국어 내공이 너무 짧은데. 더 많은 연습과 데이터가 필요한 거라고. 그래도 사실 떨어진 외국어 자신감을 올리긴 어렵다. 그냥 다음엔 기죽지 말아야지, 다음엔 먼저 대화 시작해 봐야지, 다음엔 못 알아들으면 꼭 다시 물어봐야지, 다음엔 상대방이 못 알아들어서 다시 물어봐도 기죽지 말아야지, 다음엔 더 단단한 소리로 말해야지, 다음엔 눈 피하지 말아야지, 수많은 기약만 생길 뿐이다.

 

 

 

2.

 

처음으로 사람 사귀겠다고 모임에 나갈 때였다. 사람들 말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대화의 삼십 퍼센트도 겨우 알아들을 정도였다. 모국어로 대화할 때도 빠르면 못 알아듣고 천천히 대화해도 무슨 얘기로 답을 해줘야 하지 느리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난데. 외국어 대화를, 그것도 반도 이해 못 한 외국어 대화를 쫓아가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녔다. 내 귀와 정신과 이해력을 끌어모아 이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나 집중하느라 머리에 피가 쏠리는 기분이었다. 30분만 있으면 내 형편없는 사회 에너지는 방전되는데, 언제 만나든 에피소드와 할 말 많은 사람들은 쉴 틈 없이 내 귀에 외국어를 쏟아부었다. 그래도 최대한 외국어를 내 귀로 담을 수밖에. 그러다가 사회 에너지가 방전을 넘어서 과열로 폭발할 때쯤, 내 일일 외국어 허용량이 초과할 때쯤, 이만 집에 가봐야겠다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집 가는 길에 내 눈엔 항상 초점이 없었고 몸속에선 스멀스멀 울렁거리는 마음이 돋았다. 미국 드라마 길모어 걸스를 주야장천 반복해서 들을 때도 이 사람들은 대화를 왜 이렇게 빨리하는 거야 싶었는데, 현실에선 그거보다 더 빨리 대화하면 어쩌자는 거야, 정말?

 

 

 

3.

 

이젠 대화의 육 팔십 퍼센트는 알아들을 수 있다. 그럼에도 딱히 할 말이 많아진 건 아니다. 예전보단 수다스러워지려고 노력 중인데도, 아직은 멀었나 보다. 이젠 가끔 귀를 막는 습관도 생겼다. 외국어 환경에 있으면 좋은 점은 원할 때 외부 대화를 스스로 차단할 수 있다는 거다. 잠깐 멍을 때리고 정신을 놓으면 대화 소리를 지나가는 자동차 소음 소리 정도로 만들 수 있다. 영어 말고도 덴마크어, 독일어가 공중에 떠다니는데, 가끔은 소란스러운 도로 위에 있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가끔은 영어가 모국어처럼 편해질 때도, 가끔은 모든 언어가 외계어 같을 때도. 당연히 여긴 덴마크니까, 덴마크어가 기본 언어인데도, 사람들이 나에게 냅다 덴마크어로 말을 걸 때 아직도 당황스럽다. 죄송해요, 근데 전 덴마크어라곤 안녕,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이거 얼마인가요, 좋은 아침, 좋은 오후, 잘 가, 아니, 영수증 드릴까요, 가방 필요하세요, 치즈, 우유, 닭가슴살, 삼겹살, 호박, 기타 마트에서 볼 수 있는 식자재 이름, 인칭대명사와 전치사 어쩌고 밖에 몰라요. 아, 언어 공부 언제 하지. 왜 공부 안 하니,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