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단 하나를 위해 떠나기, 독일 웨일 암 레인

text.

 
 
 
1.
 
스위스 바젤Basel에서 독일 웨일 암 레인Weil am Rhein,으로 여행을 떠나봅시다. 현대 디자인의 명소, 비트라 캠퍼스Vitra Campus을 가봅시다.
 
 
 
2.
 
유럽 여행을 다니는 동안 아침에 눈뜰 때마다 일정을 꽉 채운 내가 살짝 원망하곤 했는데, 이날도 예외는 없었다. 비트라 캠퍼스가 롱샹성당에 비해 쉬운 일정인 게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나는 아무래도... . 바젤역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해 도착한 웨일 역에서 삼십 분 정도만 걸으면 비트라 캠퍼스에 갈 수 있다. 바젤역에서부터 비트라 캠퍼스까지, 온 도시가 비트라 캠퍼스를 자랑하듯이 길목마다 비트라 캠퍼스로 안내하는 간판이 있고, 도로를 따라 설치된 작은 가구 모형이 길을 안내해 준다. 꾸밈없는 형태와 진한 페인트를 입은 건물도 방문자를 환영해 준다.
 

길 안내해 주는 비트라 가구
독일 건물, Pink, Irregular Symmetry
독일 건물, Brown, Irregular Symmetry
독일 건물, Yellow, Irregular Symmetry
독일 건물, Yellow, Irregular Symmetry
독일 건물, Green, Irregular Symmetry

 

 
3.
 
공식 가이드 투어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있다고 들어서, 건축 가이드 투어를 신청했다. 투어에 참여하기 전에 비트라 가구를 전시해 둔 빨간 벽돌 건물 안에서 한 시간을 십 분처럼 보내고, 투어에 늦을까 급하게 집결 장소로 뛰어갔다. 비트라 건축 투어는 두 시간 정도 비트라 캠퍼스 전체를 돌아다니는 투어다. 스위스 건축 그룹인 헤르조그 드 뫼롱Herzog& de Meuron이 설계한 디자인 박물관에서 시작해서 돔 구조를 발명한 미국 건축가 버크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의 돔 구조물과 캐나다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hery가 설계한 디자인 박물관,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Tadao Ando 건물, 이라크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소방서 건물 등을 돌며 진행한다. 일본 건축 그룹 사나SANAA,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로 시자Alvaro Siza, 영국 건축가 니콜라스 그림쇼Nicholas Grimshaw가 설계한 공장 및 화물 창고는 가이드 투어를 통해서만 관람 가능하고, 아쉽게도 실내 촬영이 불가능하다. 캠퍼스 내 곳곳엔 예술 작품과 여러 파빌리온도 설치되어 있는데, 프랑스 건축가 장 푸르베Jean Prouve와 일본 건축가 시노하라 카즈오Kazuo Shinohara가 디자인한 쉘터 등을 볼 수 있다. 건축 가이드 투어엔 건축이나 디자인을 공부하는 사람말고, 전혀 다른 분야를 공부하는데도 디자인과 건축에 관심이 있어서 참여한 사람도 있었다. 건축과 디자인은 전공자나 관계인만을 위한게 아니라고!
 

비트라 가구 전시
White to Black with Brown
건축 가이드 투어
헤르조그 드 뫼롱 Herzog&de Meuron, 디자인 뮤지엄
헤르조그 드 뫼롱 Herzog&de Meuron, 디자인 뮤지엄

 

 
4. 고집부린다는 건
 
헤르조그 드 뫼롱은 흔하디 흔한 벽돌을 콘크리트 벽면에 붙이는 방법보다 벽돌을 일부러 깨트려 거칠고 입체적인 질감을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겠다는 고집을 부렸다. 프랭크 게리는 본인 건물 주변에 나무가 없어야 한다고 고집부렸단다. 프랭크 게리 건물 근처엔 오로지 낮게 깔린 잔디만 있다. 안도 다다오는 나무를 없애야 한다면 설계하지 않겠다고 고집부렸단다. 그래서 프랭크 게리 건물이 지어진 같은 공터 위, 프랭크 게리 건물 옆에 지어진 안도 다다오 건물 근처엔 나무 한 그루가 있고, 콘크리트 위엔 나뭇잎이 하나 새겨져 있다. 비트라 캠퍼스에서 가장 큰 화물창고를 지어야 했던 사나는 건물을 실제 크기보다 작아 보이게 만들고 싶어서 원형 건물 형태에 커튼처럼 일렁이는 외피 디자인을 더했다. 외피의 상부, 중부, 하부의 질감을 다르게 만드는 방법을 연구해 오묘하게 빛나는 외피를 만들더니, 여름과 겨울의 온도 차이에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는 건축 재료의 변형을 방지하기 위한 콜드 조인트조차도 물결 모양으로 만드는 고집을 부렸다. 벽이 수직으로 똑바로 서 있거나 벽과 바닥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붙어있는 게 맘에 안 들었던 자하 하디드는 모든 벽을 기울어지게 만드는 고집을 부렸다. 바닥과 벽을 기울고 왜곡시켜 평평한 바닥이 경사진 바닥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고집도 부려서, 공간에 속도와 운동 감각을 부여하고 기어코 건물 사용자가 여기서 있으면 속이 울렁거린다고 고통을 호소하게 했다. 고집부리는 사람들이 아주 문제지.
 

헤르조그 드 뫼롱 Herzog&de Meuron
헤르조그 드 뫼롱 Herzog&de Meuron
프랭크 게리 Frank Ghery
안도 다다오 Tadao Ando
사나 SANAA
사나 SANAA
사나 SANAA, 콜드 조인트
자하 하디드 Zaha Hadid, Fire Station
자하 하디드 Zaha Hadid, Fire Station
장 푸르베 Jean Prouve



 

5.
 
스위스 바젤에서 프랑스 롱샹과 독일 웨일 암 레인을 오고 가며 볼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도 국경을 사이에 둔 세 도시 사이의 관계였다. 롱샹으로 가는 길에 들린 프랑스 소도시 뮐루즈와 벨포트엔 독일 영향을 받은 디자인이 많이 보인다. 조각한 듯한 기둥과 화려한 식물 장식, 신의 조각상을 달고 있는 서양 건물이 아니라, 매끈한 벽면과 딱딱하게 뚫린 창문을 가진 건물이 더 흔하게 보인다. 상대적으로 독일에서 먼 벨포트보다는 뮐루즈에 그런 건물이 더 많다. 스위스 바젤에서도 틈틈이 보인다. 호스텔 가는 길에만 봐도 군더더기 없는 형태에 강한 색감과 단정한 디테일을 가진 건물이 줄지어 있다. 다른 나라와 가까이 산다는 건, 적어도 서로 주고받는 영향만을 고려한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나라의 문화 정체성을 누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6.
 
비트라 캠퍼스 기념품 가게에서 독일과 비트라 캠퍼스와 어울린다고 생각한 책을 하나 사 들고 나왔다. 비트라 캠퍼스를 떠나 다시 바젤로 돌아가면, 저녁 기차를 타고 다음 도시로 이동해야 했기에 기차에서 읽으면 되겠다 싶었다. 디자인도 흰색, 제목도 흰색White인 책인데, 흰색이 가진 의미와 정체성, 중의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사실 바젤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만 읽어서 다 읽지도 못했다. 기차라서 멀미 난다는 핑계로 한 시간도 안 읽었다. 비트라 캠퍼스 다녀온 기념으로 한 시간짜리 책을 샀다. 
 

White, Kenya Ha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