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목적과 무관심이 공존할 때, 스위스 로잔

text.

 
 
 
1.
 
스위스 바젤Basel에서 스위스 로잔Lausanne으로 여행을 떠나봅시다.
바젤에서 로잔으로, 로잔에서 쿨리Cully로, 다시 쿨리에서 로잔으로!
 
 
 
2.
 
로잔엔 볼거리가 뭐가 있나요? 저도 몰라요... 로잔에 가는 이유는 나에겐 명확했기에 굳이 다른 이유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좋아하는 건물 하나를 내 두 눈으로 보겠다는 목적 하나만 있었다. 다른 걸 더 많이, 깊게 조사할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마음을 가볍게 먹고 여행 일정을 단순하게 만들었다. 더 많은 걸 보겠다고 욕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다만 분명한 단일 목적을 가지는 건 동시에 무지와 무관심이 내 머릿속에 자리 잡게 했다. 어느 도시를 갈지, 어떤 경로로 여행할지, 개괄적으로 일정을 계획할 땐 이랬다. 바젤에서 로잔으로 해 질 녘쯤에 넘어가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내 유일한 목적지로 가서 원하는 만큼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스위스 취리히로 이동해, 여행 중간에 만나기로 한 가족을 만난다. 어느 정도 여행의 세부 일정이 채워지고 여행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로잔 일정이 부실해 보였다. 내심 아쉬운 마음이 자라고 있었다. 결국엔 로잔에서 기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쿨리Cully라는 도시를 잠깐 다녀오기로 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스위스 내 최대 규모의 단일 포도밭으로, 스위스 화이트 와인의 주요 생산지인 라보Lavaux 근처에 있는 도시다. 쿨리 역시 산비탈에 지어진 포도밭을 쉽게 볼 수 있다. 마침 와인에 관심이 생겼던 때라, 안 갈 이유 없지, 싶었고 라보를 곧바로 내 여행 계획에 추가했다.
 
 
 
3.
 
로잔에선 기울어진 바닥을 조심해야 한다. 몽트뢰 호수에 물을 담아두고 있는 가파른 땅 위에 자리 잡았기 때문인지, 도시 전체가 오르막길이다. 지하철역이나 호수 근처에 있는 항구, 도시와 상업가 광장이 아니고서야 평평한 땅을 찾아볼 수 없다. 덕분에 독특한 그림을 로잔 시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간판에 지하철이 경사길을 올라가는 기차로 그려져 있다. 평범하게 땅 위를 돌아다니는 버스, 기차, 트램과 흔한 식당과 화장실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간판은 평소에 보던 것과 똑같다. 버스는 버스고, 기차는 기차고, 식당은 수저와 포크고. 근데 지하철 간판엔 경사길을 올라가는 바퀴 달린 전철 그림과 사람들이 못 알아볼까 봐 친절히 ’Metro’까지 적어놨다. 아마 지하철을 안 타봤다면, 지하철 간판이 왜 저렇게 생겼대, 하고 넘겼을지도 모른다.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수 있다. 나는 운이 좋았던 거지! 전철역에서 숙소까지 가야 하는 길을 보는데 오르막길만 계속 있길래, 20kg 넘는 캐리어를 끌고 오르막길을 10분이나 올라가는 건 미친 짓이라고,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지하철 플랫폼 안으로 들어가니 승강장 바닥이 기울어져 있었다. 지하철도 비스듬히 달려서, 캐리어가 자꾸 굴러가니, 당최 편히 갈 수가 없었다. 당연하게 스쳐 지나가던 정보가 도시와 이렇게 연결되더라.
 

로잔 시내 광장
로잔 길거리
로잔 간판

 

 
4.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나왔다. 길거리에 청소차와 화물 배달차가 돌아다니고, 사람은 출근하느라 바삐 움직이는 그런 아침이었다. 숙소에서 전철역까지 가는 데, 이번엔 내리막길과 내리막길, 내리막길을 가야 했다. 또 20kg이 넘는 캐리어를 내 몸에 기대며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조용한 아침에 나 혼자 ‘달달달’, ‘덜그럭, 덜그럭’ 소리 내며 돌바닥을 걸어갔다. 골목길과 도로만 지나가다, 한 번 갈림길이 있었다. 오르막길과 계단밖에 없는데 뭘 선택할 수 있겠나. 여지없이 오르막길로 올라가는데, 어떤 사람이 이른 아침에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는 걸 봤다. 아침을 주는 카페나 식당 말곤, 어떤 가게도 안 연 이른 아침인데, 이 시간에 왜 백화점에 들어가지, 지금 시간에도 쇼핑을 하나, 그렇다 하기엔 너무 우울해 보였는데, 하나도 기뻐 보이지 않았는데, 아, 백화점에서 일하는 직원인가, 그럼 들어가기 싫을 텐데, 더 우울해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오르막길을 천천히 올라가면서, 백화점 안으로 들어간 사람을 눈으로 좇았다. 입구로 들어간 사람은 곧바로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더니, 내리 몇 층을 올라갔다. 그리고 백화점의 다른 입구 문을 열고 다시 나왔다. 아, 그냥 오르막길 올라가기 싫어서 백화점 안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간 거였다. 저게 로컬 사람이라는 거구나. 저게 사람이 경사지에 있는 건물을, 에스컬레이터를 쓰는 방법이구나. 초행길엔 로컬 사람이 가는 길을 따라가야 하나. 짐이 잔뜩 있는 상태라면 아마도 더욱더...
 
 
 
5.
 
아침 일찍 찾아간 내 유일한 목적지는 일본 건축가 그룹 사나 SANAA가 설계한 건물이다. 롤렉스 러닝 센터 Rolex Learning Center라고 불리는 로잔 연방 공과대학교의 도서관이다. 개인적으로 사람이 건물 안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사람의 자유로운 행동을 이끄는 형태와 요소는 무엇인가, 에 대해 보여준 건축 실험이라고 생각하는 건물이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내 지향점 어딘가에 포함되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어딘가에도 이런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한국 어딘가엔 지어질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가끔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건물이라고 느낄 때도 있다. 그래서 가기 전 설렘을 느꼈던 유일한 목적지, 제일 순수한 즐거움과 설렘을 느꼈던 곳이다. 땅 위에 동그란 구멍이 몇 개 뚫린 거대한 직사각형 박스가 올려진 것처럼 생겼는데, 어떤 부분은 위로 들어 올려져 사람이 건물로 들어갈 수 있다. 들어 올려진 박스 아래에도 머물다가, 구멍 아래도 머물다가, 건물 입구도 안 들어가고 밖에서 한 시간 넘게 구경했다. 겨우 안에 들어가서는 직사각형 건물 모서리마다 머물렀다. 열심히 공부하는 도서관에서 나 혼자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발소리와 숨소리 내지 않겠다고, 손에는 핸드폰 카메라를 꼭 쥐고, 숨죽이며 다녔다. 쿨리로 가는 기차를 타야 했기에, 이만 가야지, 그래도 가야지, 하면서 아쉬운 마음을 잔뜩 두고 나왔다. 나는야 이리저리 빵 흘리고 다니는 헨젤과 그레텔...
 

사나 SANAA, 롤렉스 러닝 센터 Rolex Learning Center
사나 SANAA, 롤렉스 러닝 센터 Rolex Learning Center
사나 SANAA, 롤렉스 러닝 센터 Rolex Learning Center
사나 SANAA, 롤렉스 러닝 센터 Rolex Learning Center
사나 SANAA, 롤렉스 러닝 센터 Rolex Learning Center
사나 SANAA, 롤렉스 러닝 센터 Rolex Learning Center
사나 SANAA, 롤렉스 러닝 센터 Rolex Learning Center

 

 
6.
 
쿨리는 모든 주민이 부러워지는 도시였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볼 수 있는 건 서로 꼭 붙어있는 정반대의 두 세계다. 기차 플랫폼을 기준으로 왼쪽엔 가파른 푸른 산이, 오른쪽엔 흰 안개가 잔뜩 낀 푸른 호수가 있다. 산비탈의 경사가 높아서, 기차 창밖으로 왼쪽 오른쪽을 번갈아 볼 때 그 감동이 가장 강하다. 기차 안에서 왼쪽을 보면 초록색이 가득하고, 오른쪽을 보면 파란색이 가득하다. 오묘하게 푸른 호수와 화창하게 푸른 산을 배경으로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과 피크닉을 하거나 조깅하거나 호수에 뛰어들어 수영하거나 보트를 타며 시간을 보내더라. 쿨리는 혼자 다른 시간 체계를 쓰는 거 같았다. 마치 시간이 너는 바쁘게 살면 안 돼, 바쁘게 살 자격도, 이유도 없어, 평화롭고 맘 편한 시간만 보내면 돼, 그게 다야, 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쿨리 기차 플랫폼
쿨리 산 전경
쿨리 호수 전경
호수 근처 공원
호수에서 수영하는 사람
호수에서 카누 타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