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열이 나도 런던은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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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이야, 북유럽 다음으로 영국에 대한 로망이 많았다. 사실 왜 로망이 많은지 이유는 모르겠는데, 다만 영국식 영어의 발음과 악센트가 좋고, 반듯한 모자와 코트를 입고 장갑을 낀 손에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영국 신사의 이미지가 좋고, 차를 마시는 문화가 좋고, 이층버스가 있는 것도 그 이층버스가 빨간색인 것도 좋고, 영국을 대표하는 음식이 다들 맛이 없다고 손 흔드는 피시 앤 칩스인 것도 좋았다. 무엇보다 이 땅덩어리 하나와 작은 도시가 세계 시각 체계의 기준이라는 게 좋았다. 한 해가 다 끝나가는 겨울에, 또 다음 한 해가 곧 시작할 겨울에 시간의 시작점인 영국에서 새해를 맞는 걸 꿈꾸기도 했었다. 그리고 올해는 정말, 꿈처럼 영국 런던에서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런던의 연말과 새해를 맘껏 즐겨야지, 싶었는데 네덜란드에서 달고 온 감기가 런던에서 더 기승을 부렸다. 조금만 오래 여행하며 돌아다닌다 하면 항상 여행 중간쯤 몸살감기에 걸린다. 그게 왜 런던이었어야 했니? 네덜란드 공항에서 저녁 비행기를 타고 밤에 런던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고작 하룻밤 보내려고 호텔 방 예약하는 게 아까워 공항 노숙을 하려고 했었다. 런던으로 넘어가기 며칠 전 감기 기운이 있어 급하게 공항 호텔에 방 하나를 예약했었다. 열이 나고 식은땀이 나도 수상한 사람처럼 온몸을 두꺼운 옷과 모자로 덮고 콜록콜록 훌쩍훌쩍 소리를 달고 공항 안을 누볐다. 몸과 발이 젖은 이불처럼 무거워서 헉헉거리며 공항 호텔까지 가는데, 이번 여행 중 제일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어째 뜨겁고 무거운 몸이 겨우 버텨졌다. 호텔 입구 앞에 도달했을 때엔 사막에서 길을 헤매는 사람들이 오아시스와 마을을 발견했을 때 기분이 이랬을까 구름 잡는 상상도 했다지.


오늘 체크인으로 방 하나 예약했는데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저요, 싱글룸 하나요.
-죄송해요, 근데 예약자 목록에 손님 성함이 없어요. 예약한 거 맞으세요?
네, 예약확인 메일 보여드릴게요.
-며칠 전에 예약하셨어요?
아마 삼사일 전이요.
-오늘 날짜로 예약한 거 맞으세요?


아니요. 결제 전에 예약 날짜를 한 번 더 확인하지 않은 과거의 나를 조금 많이 원망했다. 조금 많이 싫어했다. 구글 맵에서 호텔을 검색할 경우, 보통 한 달 뒤 날짜를 기준으로 빈방이 있는 호텔이 검색된다. 얼른 아직 남아있는 호텔 방을 찾아 예약하고 싶었던 과거의 나의 눈에는 예약 날짜가 제대로 읽히지 않았나 보다. 아니 살펴볼 마음도 주의도 없었나 보다. 며칠인지는 확인할 마음이 있었는데 몇 월인지는 확인할 주의가 없었나 보다. 지금 호텔 프런트 앞에 있는 오늘의 내가 아니라 한 달 후 오늘의 나를 위한 호텔 방을 예약해뒀더라고. 다행히도 친절한 직원을 만나 호텔 로비에 앉아 한 시간 동안 근처에 빈방이 있는 호텔이 있나 같이 찾아봤다. 나를 위한 희망찬 소설은 없었고 역시나 갈 곳이 없었다. 자정이 넘으면 투숙객이 아닌 손님들은 호텔 내에 머물 수 없다는 내부 규정에 따라 나는 정중히 쫓겨났다. 나를 도와주었던 직원은 행운을 빌어주었고 나는 호텔에서 나왔다. 몸통만한 가방을 다시 트롤리에 올리고 걸어온 길을 다시 걸어 공항 콩코스로 돌아갔다. 어느새 자정을 넘어 공항엔 승객도, 직원도 없고 겨우 몇 명의 청소부와 경비원만 남았다. 텅텅 빈 광활한 공항에서 히터가 나오는 구석진 곳을 찾아가 몸을 눕혔다. 히터라도 잘 나와서 다행이지, 이렇게 공항바닥에 주저앉게 한 것도 나, 누구를 탓하니. 네덜란드 공항에서 런던으로 넘어오기 전 사두었던 토니스 초콜릿과 유럽 생활의 동반자인 무한도전과 함께 밤을 지새웠다,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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