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text.
0.
덴마크에 가는 게 정해진 순간과 한국을 떠나는 순간 사이 있었던 일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1.
영어 공인 시험을 봤다. 한국에선 다소 생소한 아이엘츠라는 시험인데, 주로 해외 대학에 입학 지원하거나 이민하기 전, 영어 실력을 증명하는 데 필요하다. 듣기와 읽기로 구성된 보통 시험과 달리, 듣기와 읽기 말고도 쓰기와 말하기 영역이 있다. 쓰기와 말하기 영역은 스스로 첨삭하기 어려워, 학원에 다니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영어 점수를 따기 위해 학원에 돈 쓰는 게 아까워 매번 혼자서 공부해 왔던 나도 강사를 구해야 하나 고민했다. 결국엔 학원이나 강의의 도움 없이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어학사에서 제공하는 무료 공부 자료와 첨삭 이벤트를 활용해도, 공부의 방향성을 잡고 정확한 피드백을 받기가 더 어려웠다. 괜히 의지가 떨어져 공부를 멈추었다가 다시 시작하길 반복했다. 그래도 마무리는 해야 한다고, 무작정 시험 볼 날짜를 정하고 결제하고 나서야 발등에 불 떨어진 듯 공부하기 시작했다. 듣기와 읽기는 수능 영어와 다를 것이 없었다. 중고등학교 교육에서 듣기와 읽기에만 집중해 교육을 받아온 한국인에게 쓰기와 말하기 영역은 고역이 따로 없었다. 쓰기는 시험에서 자주 쓰이는 문장과 글 구조를 외우고 쓸 내용을 구조화하는 연습을 해야 했다. 말하기는 빈출 문제에 맞춰 대답을 준비하고, 말하는 내 모습을 관찰하고 개선할 점을 찾아야 했다. 밤마다 핸드폰으로 영어로 혼잣말하는 영상을 찍곤 했다. 갤러리에 남아있는 영상을 볼 때면 민망해서 지우고 싶지만, 왠지 모를 아까움과 뿌듯함이 느껴져서 지우기를 포기한다. 알고 보니 영어에서 중요한 건 많은 단어와 문장을 아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거였다. 결국엔 영어도 소통하기 위한 도구인 언어라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저 친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는 게 중요한 거였다. 단어와 문장은 단지 재료를 위한 조미료였다.
2.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어릴 적에 집에 두발자전거가 없었던 탓에, 딱히 타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었던 탓에, 자전거를 탈 줄 몰랐다. 자전거를 못 타는 건 일상생활 속에 작은 불편함으로 남았다. 꽃이 예쁘게 핀 봄철에 한강에 가서 친구와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거나. 자전거를 타지 못하니, 킥보드도 타지 못하고, 전기 스쿠터도 못 탄다거나. 서울 시내에서 따릉이를 빌리지 못한다던가. 자전거 국토대장정을 꿈꾸지도 못한다거나. 이런 나에게 자전거는 덴마크에서 겪게 될 문제 중 하나였다. 덴마크는 자전거의 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자전거가 보편적인 이동 수단이다. 덴마크 사람에게 자전거 탈 줄 모른다고 하면 안타까워할 정도라고 하니, 자전거가 얼마나 중요한지 말 다 했지, 뭐. 그래서 자전거를 배워야 했다. 덴마크의 비싼 교통비를 감당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전거를 더 배워야 했다. 유튜브에 ‘자전거 타는 법’을 찾아, 자전거에 올라타는 법, 중심 잡는 법, 발 구르는 법을 이론처럼 익혔다.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친구에게 연락해 도움을 요청했다. 운동복 바지와 흰 양말 안쪽에 검은 기름 묻혀가며 10초 정도 페달 구르기까지 성공했다. 공터 반 바퀴도 돌지 못하다가, 코너 돌기에 성공하고, 공터 반 바퀴를 타다가, 멈추지 않고 공터 한 바퀴를 돌 수 있게 되었다. 집 근처 자전거 대여점을 찾아가 자전거를 빌려 연습하기도 하고, 부모님을 따라 시골에 내려갈 때면 할아버지 자전거를 빌려 빈 운동장에서 연습하기도 하고, 부모님과 같이 자전거 타러 가기도 했다. 다행히 덴마크에 가기 전 ‘자전거 탈 수는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었다. 막상 덴마크에 와보니 도로에서 자유롭게 안장에 올라타고 내리는 게 문제였다. 공원에서 안장에 올라타는 연습을 하다가, 지나가던 덴마크 사람에게 속성 과외를 받았다. 이제 ‘자전거 탈 수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사람 덕분에 안장에 올라타고, 발을 구르고, 중심을 잡고, 멈추었다 다시 출발하며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은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아질수록 의지에 따라 행동할 자유를 얻는다. 보편적으로 할 수 있는 걷기와 달리기 말고도, 자전거를 배우고, 수영을 배우고, 또 다른 스포츠를 배우고, 춤을 배우면, 자전거를 타고 가고 싶은 곳에 더 빨리 갈 수 있고, 자전거 대장정을 꿈꿀 수 있고, 날씨 좋은 날 바다와 수영장, 계곡에 뛰어들 수 있고, 나를 향해 날아오는 공을 잡거나 받아칠 수 있고, 흥이 나면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 있다. 행동을 배우는 건 자유를 주는 것과 같다.
3.
단기 아르바이트를 다녔다. 출근 시간에 맞춰 나가 반복되는 일을 하고, 직원 안내에 따라 기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반복되는 일을 하고, 퇴근 시간에 맞춰 집에 돌아갔다. 몇 가지 주의 사항과 방법을 들으면 바로 일할 준비가 된다. 어떤 능력이나 자격을 요구하지 않는다. 몇 시간 내내 반복되는 작업을 하니, 재미는 없다. 재미가 없어도 너무 없어서 한 시간이 두 시간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될 때 여러 번 다녀도, 통장에 들어오는 돈을 호텔에서 몇 밤 잘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이었다. 조금이라도 잔액이 늘어난 통장보다 반복되는 작업을 하며 아무 생각 없이 있거나 고민을 정리했던 시간이 더 값졌다. 남들은 ‘번듯한’ 일이라 여기지 않는 일을 본인의 일로 여기며 열심히 사는 사람을 볼 수 있었고,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가 고민할 수 있었다. 낯선 환경에선 관찰을 생존 본능으로 삼으며 새로운 일에 적응하는 속도가 빠르다는 걸 알았고, 다른 분야에서 일하지만 비슷한 고민을 하는 또래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4.
대학 동기의 졸업 전시 준비를 도와줬다. 예전엔 ‘몇 년 뒤엔 같이 졸업 전시 준비하고 있겠지’ 생각하곤 했다. 휴학할 생각이 없었으니, 별일 없으면 같이 졸업하겠거니 했다. 막상 몇 년 뒤가 지나니, 나는 그 자리에 있길 포기하고 다른 자리를 꿈꾸게 되었다. 동기는 학교에서 졸업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본가에 있었다. 졸업 전시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동기를 도와주러 오랜만에 학교에 갔다. 매번 밤을 새우며 작업을 했던 작업실이, 기숙사보다 많은 시간을 보냈던 작업실이 어색해 보였다. 사람은 과거의 고통을 좋은 기억으로 바꾸어 저장하는 능력이 있는지, 스트레스의 원인이 그리움의 대상으로 보였다. 작업실 안에서 작업하고 있는 동기는 퀭해 보이는 몰골로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동기 주변엔 커피와 간식거리, 메모지, 작업물 잔해가 쌓여 있었다. 강의를 마치고 작업실에서, 디자인 피드백을 받고 나서 술자리에서 ‘우리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 졸업은 어떻게 하냐?’ 얘기하던 사람이 졸업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니. 나는 어쩌면 졸업하기 싫어서, 졸업하기 전에 다른 걸 해봐야겠다고 도망친 사람으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대단해 보였다. 그런 나로선 시간을 내어 전시 준비를 도와주고, 졸업 전시에 선물을 들고 찾아가고, 수고 많았다고 말을 전해주고, SNS에 올라오는 게시글에 ‘좋아요’를 눌러주면서 작은 존경과 공감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내 졸업 전시는 어떡하지! 막막해도 너무 막막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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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친구와 가족과 같이 하루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시간을 낸다는 게 쉬우면서도 쉽지 않은 일인데, 주변 사람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잔잔한 고마움이 느껴질 뿐이었다. 한여름에 연말을 맞이한 기분이었다. 집 밖에서 밥 먹는 일이 많아지면서도, 집 안에서 집밥을 같이 먹는 일도 많아졌다. 소소한 근황을 공유하거나 고민을 공유하기 위해 같이 밥을 먹거나,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는 일이 많아졌다. 주말에 엄마 따라 하이킹하는 일이 많아졌고, 아빠 따라 시골에 내려가는 일이 생겼다. 부모님과 같이 공원에 가서 노는 일도 생겼다. 짧게나마 해외여행을 가는 일도 생겼다. 언제 무슨 일을 했던, 나중에 기억에 남는 건 누구와 시간을 보냈는지, 웃으며 시간을 보냈는지, 울며 시간을 보냈는지다. 이제 생각해 보길, 울었던 기억은 없고 웃었던 기억만 떠오른다. 그 어느 때보다 밀도 높은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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