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빈칸 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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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끝맺음이 없는 글이다. 글을 시작한 작성일은 있어도, 글이 끝날 출판일은 없다. 빈틈 많은 내 주변을 메우고 채워지는 사람을 따라 점점 채워지고 길어질 글이다. 

 

1. 불안은 배움

엄마는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집안일하고 내일 먹을 음식을 요리하면서도, 밤이 되면 운동하러 나간다. 회사에서 일하는 것도 배움일 텐데, 퇴근하고 책상에 앉아 평생교육원 수업을 듣고, 자격증 공부한다. 부모님과 가족을 돌보느라 주말마다 시골에 내려가는데도,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 잠깐 멈추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 엄마는, 왜 사람은 공부와 배움을 멈추지 못할까? 모든 공부와 배움은 불안과 부족함을 견디지 못함에서 시작되기에 마음이 측은해진다. 동시에 모든 공부와 배움은 부족함과 미숙함을 견디는 일이기에 마음이 경건해진다. 결코 완벽해질 수 없는 게 사람이라면, 부족함과 미숙함을 견디고, 배움을 멈추지 않는 걸 배워야겠다. 배움에서 배워야 하겠다.
 
 
 
2. 술고래 연대
 
가족이 다 모인 날이면, 저녁으로 차려진 음식을, 저녁을 먹고 야식으로 배달시킨 음식을 빌미로 밤늦은 술자리가 벌어진다. 매번 특별하거나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에 대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각자 해야 할 일로 바쁜 가족이 모이고 음식과 이야기가 오면, 술과 음료수가 같이 따라온다. 음식과 술이 마련된 우리 집엔 술 한 모금에도 얼굴이 빨개지는 고래와 아무리 술을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지 않는 술고래와 어느 정도 마시면 얼굴이 시뻘게지는 술고래가 있다. 고래와 술고래와 함께 가졌던 술자리 덕분에, 음식과 술 너머로 오고 가는 보이지 않는 정과 연대를 배웠다.
 
 
 
3. 텔레비전 안으로 도망칠 수 있다면
 
우리 집엔 광개토대왕이 잠깐 살았었다. 소림을 연마한 축구 선수도 살았었다. 중국 역사 속 이름 모를 인물도 살았었다. 아마 마동석도, 톰 크루즈도, 드웨인 존슨도 살았을 거다. 아빠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이름 모를 채널에서 방영하는 광개토대왕 드라마와 소림축구, 중국 드라마를 보곤 한다. 드라마가 끝나면 방송 편성 시간이 끝날 때까지 영화를 연속 방영하는 채널로 돌아가 영화를 본다. 아빠는 작은 탈출구를 집 안에 만들었다. 덕분에 나는 아빠와 같이 볼 영화를 고를 때 가장 힘들다. 넷플릭스에 있는 어떤 영화를 골라도 나는 안봤는데 아빠는 봤다거나, 드디어 둘 다 안 본 영화를 찾아 같이 보다 보면 아빠가 이거 본 거 같다며 나지막하게 말한다. 둘 다 안 본 영화를 보는 방법은 새로 개봉한 영화를 보는 방법뿐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집 안에 있던 탈출구가 점점 작아진다. 아빠는 이제 광개토대왕과 소림축구선수, 마동석 없이도 밤을 잘 보내는 거 같다.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밤을 보낸다는 건, 무척 찾아다니고 소비하던 걸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을 때 오는 걸까. 
 

 
4. 익명의 공동밭

나는 의심의 여지 없이 나를 위해 일구어진 환경 안에서 자란다. 일과 휴식의 구분도 없이 꼬박 밤새가며 공부하고 마침내 합격하길 바랬던 시험에 붙을 때에도. 집중해서 공부하라고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발소리를 내지 않으며 걸어다니고 잠깐이라도 쉬면서 하라고 간식을 방 안으로 들여 주는 가족이 있다. 휴식을 위해 따뜻한 집에 머물며 좋아하는 영상을 보고 음악을 듣고 음식을 먹고 차 한 잔을 마실 때에도. 누군가 만든 집이 있고 누군가 지켜온 집이 있고 누군가 일군 음식이 있다. 그러다 보면 세상에 있는 일과 사물과 생물은 모두 연결되고, 내가 온전히 이루어 낸 것이나 일굴 수 있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5. 시장 말고 집

이 물건은 얼마고 저 물건은 얼마고 이 일은 주식 얼마를 올리고 저 일은 주식 얼마를 내리고 이 사람은 SNS 팔로우가 몇 명이고 저 사람은 SNS 팔로우가 몇 명이고 이 글은 댓글이 몇 개고 저 글은 댓글이 몇 개고 모든 정보가 수치화되고 데이터화 되는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환경은 수치와 데이터 세상에서 벗어난다. 어쩌면 나와 가장 가까운 환경만이 살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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