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text.
01.
우리는 수많은 만남과 우연 속에서 적당한 것들을 찾아 마땅히 좋아하고 소비한다. 소비와 취향도 우연과 선택으로 이루어지고 다듬어진다고 생각한다. 우연히, 어쩌다 보니, 어느새, 모르는 새, 아무 생각 없이, 막상, 알고 보니, 이제 보니, 졸지에, 한번, 오히려, 생각보다, 마침, ... 해보니 좋더라고. 다만 모든 일엔 항상 이유가 있다. 심지어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에도 발견되지 못한 이유와 발견되길 바라지 않은 이유가 있다. 이유가 뭐든 소비는 쌓이고 소비는 소지로, 또 새로운 소비의 누적은 소지의 소실로 이어진다. 소지의 기간은 다 다르며, 소지의 깊이도 다 다르다.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로 옅은 소실도, 기억에 각인될 짙은 소실도 있다.
02.
물건과 시간을 소비하고 취향을 누릴 수 있는 부지런한 사람을 찾는다. 소비를 반복해 쌓고 취향을 넓히거나 뾰족하게 만드는 일, 소비와 취향에서 이유를 찾는 부지런한 사람을 찾는다. 어느 날 우연히 먹은 초밥이 기억에 남아 다음에 한 번 더 찾아가는 것도, 한 달이나 일주일에 몇 번씩 먹으러 가는 것도, 며칠을 내리 찾아가는 것도, 그러다 다른 초밥들은 갖고 있지 않은 다른 점이 보이고 그것이 취향으로 굳어지는 것도. 굳이, 그렇게까지, 의문을 들게 하는 것들을 여러 번 굳이, 시간 내어 소비하는 일이 많아질 때, 시작점엔 애정과 사랑이 있다고 믿기로 했다. 또 소비는 집과 방 안에, 몸에 쌓여 밖으로 드러난다고 믿기로 했다. 벨 훅스는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말한다. 사랑은 대상과 본인의 영적 속성의 성장을 위해 의지를 가지고 행동으로 실천함으로써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
03.
인터넷 쇼핑몰에서 산 청바지를 좋아한다. 빳빳한 플라스틱 포장지와 새 원단 냄새가 나던 청바지였던 것은 이제, 바지 끝단은 해져 하얀 실밥이 터져 나오고 바지 밑단엔 구멍이 나고 바지 손주머니는 손때가 타서 하얗게 닳았다. 그럼에도 버리지도 못하고 옷장에서 꺼내입고 빨래통에 넣고 빨래를 하고 말리고 옷장에 개어 넣고 또 꺼내입는다. 바지 밑단에 난 구멍이 점점 더 큰 구멍이 되어가는 걸 보면서도 다시 옷장에 넣는다. 재작년쯤 나를 위한 신년 선물로 구매한 북유럽 디자인 브랜드 허스탈의 비엔다 테이블 램프를 좋아한다. 크롬 도금이 된 조명 다리 위에 불투명 유리로 된 조명 갓이 얹어져 있다. 전구를 켰을 때 빛이 불투명 유리 밖으로 은은하게 퍼지고 주변을 밝힌다. 조명 갓이 두께와 무게에 비해선 충격에 약해 쉽게 이가 나가고 깨져버리지마는, 하얗게 쌓인 눈 위에 저녁노을 빛이 앉은 것처럼 전구 빛을 따뜻하고 포근하게 퍼트린다. 독일 디자인 브랜드 브라운의 클래식 아날로그 탁상시계를 좋아한다. 군더더기 없는 사각 몸집에 원형 창이 있고, 창 안엔 하루 이십사 시간을 나누는 육십 개의 선과 열두 개의 숫자가, 또 검은색 시침과 분침, 노란색 초침, 그리고 초록색 침이 있다. 탁상시계엔 인터넷에서 산 청바지나 매일 밤낮으로 켰다 끄는 조명처럼 손때가 타진 않았어도 윗머리에 먼지가 쌓이는 건 싫어 마른 수건으로 먼지를 털어낸다. 매번 손에 닿아 놓인 위치와 상태가 바뀌는 것들, 매번 손에 닿아도 바뀌지 않는 것들, 매번 손에 닿지는 않아 먼지가 쌓이는 것들, 손도 기억도 닿지 않아 흔적과 자취를 감춘 것들이 공존하며, 딱 그런 상태가 고유의 성질로 굳혀진다.
04.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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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이 있는 음악은 싫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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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 스피커가 나름대로 좋았습니다. 작지만 소리가 잘 어우러지고 근성도 있어서. 나중에 새것으로 바꾸긴 했지만 지금도 작업실에서는 L88을 애용합니다. 패널은 고양이가 할퀴어서 엉망이 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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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재즈 클럽이 미국 뉴저지 주의 몬트클레어라는 작은 고장에 있습니다. 정말로 작은 재즈 클럽이라 당연히 과잉된 PA 같은 것도 없고, 바로 코앞에 있는 무대에서 뮤지션이 농담을 던지기도 하고, 손님은 긴장을 풀고 편안한 분위기로 재즈를 들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그런 곳에서 들었던 소리가 ‘좋은 소리’의 레퍼런스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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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모리슨의 소울 키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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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대부분은 스쳐지나간 과거가 되어버렸다. 그 시대에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고 몸속을 꿰뚫을 것만 같던 많은 것들이 십 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보면, 교모하고 번드르르하게 꾸며진 약속 같은 것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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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방 정리를 하는 데만 꼬박 며칠이 걸렸다. 충분히 정돈된 듯한 책장에 있던 책과 꽉 찬 서랍장에 있던 잡동사니를 꺼내어 새로운 정렬 방식으로 다시 꽂아넣기를 반복했다. 자주 쓰는 것들을 밖으로 내놓고 덜 쓰는 것들은 안쪽으로 밀어 넣는다. 먼지가 쌓인 것이나 흔적과 자취를 감춘 것이 어떤 방식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바라보고 버릴지 아니면 가지고 있을지 고민한다. 새롭게 채워 넣을 것을 위해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린다는 생각으로 정리한다. 앞으로 더 사야 할 책과 애정할 물건을 위해 빈칸을 넉넉히 두어야 한다. 그대로 남겨진 것은 닳도록, 새롭게 채워질 것은 뾰족해지도록, 버릴 것은 기억해둘 흔적만 남기고 옅어지도록. 꽉 채우지 않고 적당히 비워두어야 채워야 할 이유와 채워야 할 것이 생긴다. 다시 적당함을 마땅히 소비하고 좋아할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