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text.
1.
스페인으로 여행을 가기 전에, 스페인이 어떤 나라인지 알고 싶었다. 급하게 스페인 역사와 지리 정보와 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수많은 정보를 담고 흘려보내길 반복하고, 지금에서야 머릿속에 남은 정보를 꺼내 본다. 이베리아반도니 아라곤 왕조니 카탈루냐니, 이런 애들은 머릿속에 남아 있지도 않다. 스페인은 인구 과반수가 주요 도시를 포함한 국토 일부에만 거주한다고 한다. 스페인은 한국처럼 대륙 대부분이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인데, 높은 산맥이 위치한 곳에는 사람이 거주할 수가 없으니 산맥 저지대와 평지가 있는 곳에서 주로 사람이 모여 살고 도시를 형성했다. 지형 특징뿐만 아니라 1950년경 시행된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빌바오 등 주요 대도시에 편중된 산업화 정책으로 인해 거주인구는 더 편중되었다고 한다. 한국만이 편중된 과밀 도시와 싸우는 게 아니다. 스페인, 미국, 네덜란드 등 여러 국가와 도시가 밀집 도시와 싸웠고 싸우고 있다. 스페인은 어떻게 밀집되어 있는가?
2.
스페인 마드리드 공항에 자정쯤 도착했다. 숙소 호스트와 연락하며 숙소로 가기 위해 지하철에 올라탔다. 몇 시간 되지 않는 이동 시간이었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피곤이 배로 느껴졌고 침대에 눕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공항 터미널 역을 벗어날 때쯤, 호스트로부터 체크인이 오늘이 아니고 내일 오후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갑자기 하룻밤을 머물 수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방을 예약하기 전에 호스트와 체크인 시간을 의논하던 중에 서로 이해했던 게 달랐던 것인지, 지금은 다른 게스트가 사용 중이라고 내일 오후에야 체크인할 수 있다는 거다. 한밤중에 시내와 공항 사이 어딘지도 모를 역에서 멈춰 오갈 데도 없이 방황하다가, 결국 공항으로 다시 돌아가 해가 뜰 때까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공항에 올 때마다 매번 노숙하게 되는 상황이 웃겼다. 새벽공기에 차갑고 딱딱한 공항 의자에 불편하게 기대고 캐리어에 발을 올리고 잠을 청하는 게, 해가 뜨고 공항 밖으로 나가기 전 화장실에서 간단히 나갈 준비하는 게 익숙해졌달까. 해가 뜬 스페인은 더워도 너무 더웠다. 숙소에 못 들어가고 잠은 제대로 못 잤어도 여행은 해야 한다고, 아토차역에 짐을 맡기고 계획대로 여행을 시작했다. 씻지도 못해 개운하지 못한 몸으로 더운 날씨에 땀을 흘리며 돌아다니니 꼬질꼬질한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들 정도였다. 너무 더워 현기증이 나고 걸을 힘조차 잃을 정도라, 스페인에 왜 시에스타가 있는지 알았다. 그렇게 밖에서 이리저리 하루를 보내고 겨우 도착한 숙소는 솔 광장에 있는 평범한, 에어컨 없는 아파트였다. 창문을 열어두어야 그나마 잠에 들 수 있는데, 창문을 열면 바로 건너편에 벽과 창문이 보인다. 같은 건물이거나 같은 블록 안에 있는 건너편 건물인 거 같은데, 창문을 열어두면 얼굴을 마주 보고 인사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벽과 벽에 줄을 걸어 빨래를 널어 둘 정도로 가깝다. 이게 스페인이 밀집되어 사는 방식인가?
3.
유럽은 어디나 거리와 공원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마드리드는 특히 광장과 공원이 열정과 낭만이 넘친다. 거리를 더 둘러보고자 굳이 더 먼 길을 선택해 레티로 공원을 돌아 티센 박물관으로 가는 중이었다. 레티로 공원 앞에 있는 시벨레스 광장에 색색의 옷을 입고 분장을 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쇠 신발을 신고 화려한 화장을 하고, 두꺼운 공연 옷을 입은 사람들이 광장과 대로를 꽉 채우고 있었다. 음악에 맞춰 도로 위에서 줄지어 행진하며 춤을 추고 있었다. “Fraternidad Cultural Potolos Boliviamanta Madrid”, Potolos Boliviamanta 축제를 넋 놓고 구경했다. 더위를 잊은 채, 남녀노소 상관없이, 춤과 노래만으로 도시를 무대로 만드는걸. 역동적인 광장을 마주했다. 이와 반대로 건물과 음식점에 둘러싸여 있는 마요르 광장은 사람이 많아도 정적으로 느껴진다. 광장 가운데에 서 있는 동상은 독립적이고, 광장 가장자리에 있는 음식점과 상점 주변에서만 활기가 느껴진다. 마요르 광장은 고요한 움직임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오히려 주변 거리에 있는 작은 광장들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음식점 테이블이 놓여있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있고, 광장을 더 가까이에서 내려다보는 건물들이 있다. 상점과 주택, 로컬 시장이 늘어선 거리는 광장과 또 다르다. 그들 삶의 모습과 가장 근접해 있으면서도, 관광과 상업주의에 꾸며진 삶의 모습에 기이함을 느낀다. 로컬 시장을 구경하러 온 관광객과 그런 관광객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로컬인, 그리고 관광객으로 방문한 나. 여행하는 동안 내내 느꼈던 헤아릴 수 없는 기분이었다. 산미구엘 시장에서 사 먹은 스페인 간식과 시원한 맥주에 다 씻겨져 사라졌지만. 오히려 길에 놓인 식수대에 더 정을 느꼈다.
4.
광장엔 에너지와 흥이 넘친다면, 공원엔 여유와 동심이 가득하다. 마드리드 내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레티로 공원은 작은 테마파크 같다. 공원 중앙에 푸른빛 인공호수와 보트, 오리배가 있다. 보트를 타고 호수 위를 떠다니는 사람을 보다 보면 괜히 솜사탕이나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싶어 진다. 공원 산책로에선 예술가들이 그림을 그려주고, 글을 써주고, 풍선 장난감을 만들어 준다. 인기 있는 만화 캐릭터 탈을 쓴 사람도 돌아다니며 동심을 자극한다. 동심에 이끌려 인형 탈을 쓴 사람과 사진을 찍고 나면 동심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진 한 장에 돈을 달라고 하는 캐릭터들 때문이다. 밥벌이로 인형 탈을 쓴 사람에게서 동심을 잃어버린 건 오래고, 인형 탈 속에서 땀 흘리고 있을 사람의 현실을 상상하게 된다. 그래도 인형 탈 앞에 서서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저게 동심이고 순수함이라고, 동심이란 자체로 순수하게 존재하지 못하지만, 누군가로부터 지켜져 왔던 거라고 느낀다.
5.
여행을 다니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여행 내내 동행할 사람은 찾지 못하더라도, 저녁에 밥 한 끼와 술을 같이 먹을 인연을 찾고 싶었다. 여행 며칠 전, 식사 동행을 구하기 위해 여러 커뮤니티에 여기저기 글을 올렸다. 다행히 많은 분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매번 빛나는 저녁과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여행에서 만난 인연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주고, 다른 삶을 엿볼 기회를 준다. 서로 공통된 관심사나 직종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 어떤 사회적 관계도 없는데, 단지 여행이라는 이유로 연결된다. 여행을 오게 된 계기도, 여행을 계획한 정도도, 여행을 오기 전 보내고 있던 삶도, 여행 다음에 다시 돌아가야 할 삶도 다 다르다. 내가 하지 못하거나,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게 누구에겐 당연하고 별일이 아니곤 한다. 회사 연수로 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장기 휴가를 내고 온 사람이 있고, 교환학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여행으로 온 사람이 있고, 시험 결과를 기다리며 여행을 온 사람도 있다. 하루하루 계획을 다 짜고 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항공편과 여행 동행만 구해 동행을 따라 즉흥으로 여행하는 사람이 있다. 여태껏 만나온 사람 중 누구보다 짧은 시간을 공유했지만, 알기 힘든 연대감과 공감이 생기는 인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