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text.
1. 3개월
내 여행 일정에 맞춰 가족도 잠깐 유럽 여행을 오기로 했다. 나는 가족보다 먼저 여행을 시작했으니, 나는 여행 도중에 다른 도시에서, 가족은 한국에서 출발해 한 나라에서 만나는 식이었다. 우린 스위스 취리히에서 만나 스위스 여행을 하고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헤어져 다시 각자 생활로 돌아가는 계획이었다. 취리히에서 만나기 전, 먼저 스위스 다른 도시를 여행하고 있던 나에게 갑자기 연락이 왔다. 공항으로 가기 전날 밤 마지막으로 짐을 정리하는 엄마였다. 스위스 산 올라가면 상당히 춥다며, 그래서 목 폴라티도 챙기고 겨울옷도 챙겼어, 여름옷은 하나만 챙겼어, 아니 엄마, 높은 산 올라갔을 때 빼곤 더워, 반팔도 더워, 엊그제 산꼭대기 간 아는 사람은 플리스 재킷만 입고 올라갔던데, 여름옷 여러 벌 챙기고 겨울옷은 얇은 거로 하나만 챙겨도 될 거 같은데, 엄마 그러면 짐 다시 싸야 해, 너희가 춥다고 해서 겨울옷만 챙겼지, 또, 아니야, 아니야, 엄마, 여름옷 많이 챙겨, 나 덥다고 민소매 입고 다니잖아, 청바지도 다 던져버리고 싶었는걸, 아이, 짐 다시 싸야겠네. 엄마는 결국 밤 중에 짐을 풀고 다시 정리해야 했다. 다음 날 나는 스위스 로잔에서 취리히 공항으로 바로 이동해 공항 도착장에서 가족이 나오길 기다렸다. 도착장 문이 열리고 보이는 건 덥다고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가볍고 얇은 옷을 입고 있는 가족이었다. 여기 왜 이렇게 더워, 내가 덥다고 그랬잖아, 이렇게 더운 줄 몰랐지, 아니, 엄마 스위스 온다고 스위스 국기 그려진 양말 신었어. 그렇게 3개월 만에 다시 만났다. 학교에 있다 보면 3개월 동안 못 만나는 거야 쉬웠고 별일 아니었는데. 집 떠나 머무는 장소가 물리적으로 멀다는 이유만으로 집이 그립냐, 집으로 돌아가고 싶냐, 하며 묻는 말이 당연하듯 따라온다. 딱히 그립진 않은데. 아닌가, 그리운가. 안 그리운데 그리운 거 같기도 하고 그립냐고 물어보니 그리워야 하나, 싶고, 또, 그렇게 그리운 건 아닌데 그리워야 하나. 그냥 그동안 여름 햇볕에 탄 피부나 자랑한다. 나 엄청나게 탔지, SNS에 올린 사진만 보고도 친구가 왜 그렇게 탔냐고 그래, 나한테.
2. 더위섬
취리히에서 하룻밤을 머물곤, 다음날 인터라켄으로 이동했다. 점심 기차를 타고 인터라켄에 도착했을 땐 이른 오후였고, 숙소에 짐을 두러 가야 했다. 에어컨이 없는 숙소에서 머무르는 우리에겐 불행인 사건 중 하나였다. 뜨거운 여름 온도에 잔뜩 데워진 숙소에 들어가는 일은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전망이 좋은 곳으로 고심해서 고르고 고른 숙소인데, 아름다운 전망이 보이긴커녕 답답한 회색 소파만 보였달까. 짐을 내려두고 찜통 속에서 숨을 좀 돌리고, 여행 일정을 위해 나가야 했다. 잔뜩 더위를 먹은 채로 나서는 여행길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목적지는 인터라켄과 가까운 이젤발트라는 마을이었다. 배를 타러 가는 길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눈앞에 있는 목적지가 한 시간 거리처럼 느껴지고 도보 10분 남았다고 보여주는 구글 지도를 믿기 싫어졌다. 사랑의 불시착에서 현빈이 피아노 쳤던 곳이래, 여기가, 하고 더위에 지친 기운을 북돋으려 해도 죽은 기운이 살아날 리가 없었다. 다행히 배 선상 위에서 맞는 바람에 기운이 되살아난다. 그럼에도 이젤발트를 구경하며 온몸에 쏟아지는 여름을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을을 구경하는 가장 짧은 길만 선택해야 했고, 그것조차도 다 보지 못하고 갔던 길을 되돌아가 더 멀리 이동하는 걸 그만뒀다. 그럼에도 마을 주민이 카약과 보트를 타고 물속에서 노는 모습을 봤다. 물속에서 노는 게 생활의 일부처럼 보였다. 그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 집 문을 열고 나와 마당을 가로질러 나가고 도로 하나와 좁은 도보 하나를 건너면 바로 호숫가에 발이 닿는다. 호숫가는 사람이나 보트가 바로 들어갈 수 있게 기울어진 바닥이나 계단이 놓여있다. 당장이라도 물에 들어갈 수 있는 호숫가. 이미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 온몸이 건조되는 듯한 강한 햇볕. 이건 나도 물속에 뛰어들고 싶다, 나도 저곳에 함께 몸 담그고 싶다, 생각하게 했다. 나 물에 들어갈래, 말했다. 근데 난 수영 못 해. 내 발만 물에 들어갈래, 하고만 말했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바짓단을 접어 올린 다음 물속에 발을 담갔다. 계단을 따라 몇 발짝만 물속에 들어갔는데도 더위가 한결 가셨다. 다만 더 깊이 들어가지도 못하고 물속에 있으니 앉지도 못하고 잠깐 우두커니 물속에 서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더 할 도리가 있나. 더위는 한결 가셨고, 물기를 말리기 위해 바짓단을 접어 올린 채로 두고 길을 걸었다. 아마 5분도 안 되어서 다 말랐던가. 이거 말곤, 찜통 같은 더위에 할 수 있었던 건 더위에 화내고 마트에서 그나마 냉장고에 있어 시원한 이온 음료를 사서 마시고 실내 진열대에서 여름 공기에 녹은 초콜릿을 사서 먹는 일뿐이었다.
3. 반계획
아마 융프라우요흐를 보기 위해 스위스를 가족 여행지를 정했다고 해도 반박하지 못 할 거다. 스위스에 가기 전부터 스위스에 있던 날까지도 기상 확인을 했다. 맑은 하늘의 융프라우요흐를 보기 위해서 날씨 좋은 날을 골라 가야 했다. 스위스 여행 기간 내내 하늘이 흐리고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에 계획 A뿐만 아니라 계획 B, C를 준비하곤 했다. 인터라켄에서 머무는 매일 아침 기상을 확인하고 날씨가 좋으면 융프라우요흐에 가고 그렇지 않으면 인터라켄 인근 도시를 구경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날씨가 좋지 않아 아무래도 산에 올라가도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베른으로 떠났다. 베른엔 도심 오른쪽에 S자로 도심을 감싸고 있는 강이 하나 있다. 그리고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가로지르는 물길이 하나 있고, 물길은 흘러서 강으로 간다. 이 물길을 따라 구시가지 길거리가 있고, 물길 위에 분수대와 조각상이 놓여있다. 분수대와 조각상, 물길을 따라 있는 건물과 상가를 따라 트램과 자동차도 지나간다. 길거리를 구경하고 사진을 찍다가도 지나가는 트램과 자동차에 몸을 피하길 반복했는데, 아무래도 스위스 중에선 가장 정신없던 도시였다. 작은 마을 같은 도시여도 스위스 도시니까, 그럴 수 있지. 베른에서 인터라켄 숙소로 돌아오는 길엔 슈피츠에 들렸다. 슈피츠엔 마침 음악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사전에 표를 사지 않았기에 축제 부스 안으로 들어가진 못했다. 그래도 건너 들려오는 음악을 배경으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미술관을 바삐 돌아다니며 유명한 예술 작품을 하나라도 더 보고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하나 더 먹는 것도 좋지만, 흘러나오는 음악을 배경에 두고 멍때리는 것도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여행의 큰 일부였다고.
4. 낯선 것, 익숙한 것
해외 패키지 상품이 아니고서야 해외 자유 여행을 가족끼리 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길을 지나가며 보이는 간판조차도 낯설 수 있고, 대중교통에서 티켓 하나 사는 것도 낯설 수 있다. 식당에서 서빙 직원 부르는 것도 낯설고, 팁을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계산하는 것도 낯설 수 있다. 매번 낯선 상황을 마주하다 보니, 누군가는 당연한 일이라 여기고 설명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동시에 누군가는 다른 방식으로 당연한 일이라 여기고 여전히 누군가 설명해 주길 원한다. 그래서 작은 것에도 오해가 쌓인다. 오해에 다투다가도 같이 낯선 걸 보면 신나서 금방 다툰 일을 잊는다. 그게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그렇다. 하루는 숙소에 들어가기 전 마트에 들렸다. 스위스에서 규모도 크고 판매하는 상품도 다양하기로 유명한 쿱Coop 마트였다. 매대에 진열된 다양한 종류의 과일과 야채에 단순히 기뻐하기도 하고, 색다른 걸 하나씩 먹어보겠다고 장바구니에 갖가지 과일을 담으며 순진히 신나 하기도 하고, 알록달록 색칠된 계란을 보고 이걸 사야 할까, 말아야 할까, 그냥 흰 계란을 사야 할까, 색칠된 계란을 사야 할까, 고민하기도 한다. 그렇게 낯선 것이 여행 내내 우리를 신나게 해주곤 했다. 안타깝게도 낯선 것은 며칠이 지나면 익숙한 것이 된다. 숙소가 어디인지 모르니 무작정 호스트를 따라가다가도 며칠 뒤면 구글 지도 없이도 숙소를 찾아간다. 빨간 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을 보며 뭐라 하면서 한국에선 저러면 큰일 나지, 하다가도 며칠 뒤면 자연스럽게 빨간 불에도 주변을 살피다 횡단보도를 건넌다. 여행은 어쩌면 낯선 걸 익숙하게 만드는 방법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아, 결국엔 흰 계란도 사고 색칠된 계란도 샀다. 삶으니 색이 연해진다고, 먹어도 되는 거냐고, 그러면서 맛있게 먹었다. 알고 보니 스위스에서 색칠된 계란은 삶은 계란이란 뜻이란다. 우린 그것도 모르고. 계란을 두 번 삶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