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text.
1.
올해 여름 비행기를 타기 전 어느 평범한 날 중 하루였다. 내 상황과 기분에 맞는 책을 골라 비행기에 데려가고 싶다는 생각에 집 근처에 있는 알라딘 중고 서점에 갔다. 서점 안에 놓여있는 검색대에 ‘여행‘이라는 키워드를 쳐서 나오는 모든 도서 목록을 살펴보고 흥미가 생기는 도서가 보관되어 있다는 분류번호를 종이에 적었다. 어릴 적 도서관에서 봤을 법한 어린이 만화부터 관광지를 나열한 여행 책자까지 들쳐봤다. 서점에서 한 시간 넘게 서성이다가,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검은색 커버지엔 비행기 창문 밖으로 내다보이는 구름 사진이 그려져 있고 빨간색 글씨로 책 제목이 쓰여져 있다. 책 제목도 ’여행의 기술‘이라 하니 이 책을 읽으면 당장이라도 나는 여행 아래 숨겨진 모든 것을 알 수만 있을 것 같았다. 여행 아래 늘어진 의문을 해결해 줄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저자가 알랭 드 보통이란 사실이 책을 살지 말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전에 알랭 드 보통의 다른 저서를 읽어본 얕은 경험으로 말하길, 나는 도통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읽다보면 잠에 드니 밤에 침대에 누워 책장을 펼 수가 없더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과거의 내 입장을 따라 다른 책을 찾으러 가야할지 이미 널리 알려진 알랭 드 보통의 명성을 믿고 이 책을 사야 할지 고민했다. 책을 들어 품에 껴고 돌아다니며 다른 책을 구경하다가 책을 다시 제자리에 두고 다른 데에 갔다가 돌아오길 반복하다가 결국 알랭 드 보통을 따르기로 했다. 아무래도 책 제목이 나에게 ’넌 이 책을 사야 해‘라고 하는 것 같았달까. 그러곤 다음엔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 여러 권 꽂혀있는 서고 앞에 쭈그려 앉아 비슷한 책들을 들고 무엇을 살지 고민했다. 중고 책은 같은 책이라도 상태에 따라 다른 값에 판매되곤 한다. 사려는 책이 내가 책을 읽으며 견딜 수 있을 만한 흔적을 갖고 있는지, 흔적을 감수하고 마땅히 지불할 수 있는 가격인지 저울질하는 일이 필요하다. 너무 먼지가 쌓여있고 색이 바랜 책이라면 읽다가 재채기가 나올 것만 같다던지, 낙서가 많은 책이라면 프린트된 글자를 읽다가 펜 잉크로 눌러써진 글자에 시선을 빼앗길 것만 같다던지, 아님 찢어진 책장 모퉁이가 읽던 문장의 뒷말을 삼켜버릴 것만 같다던지. 중고 책이 상태가 너무 좋아서 새로 출판된 책과도 같은 가격이라면 내가 왜 중고 책을 사겠어, 하는 심보가 생긴다던지, 그런 것들. 그렇게 만족스러운 상태의 책을 원가의 반값 정도 되는 가격으로 사들고 집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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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산 지가 언젠데, 나는 이제서야 이 책을 다 읽었다. 중고 서점에서 책을 사자마자 호기롭게 읽다가 흥미가 떨어져서 방 어디 구석에 놓았다가, 비행기 타기 전에 가방에 꼭 챙겨넣었다. 수화물 최소 무게 조건을 맞추느라 캐리어 안에 있던 옷을 꺼내 내 몸에 얹으면서도 이 책은 나와 같이 비행기 타고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팔 옆에 끼고 있었다. 겨우 나와 같이 비행기를 탄 책은 내 여행 짐 목록 중 하나가 되었다. 여행갈 때 마땅히 챙겨갈 만한 여력이 된다면 챙겨가곤 한다. 공항에서 탑승을 기다리면서 읽기도 하고 달리는 기차 안에서 읽기도 하다가 챙겨놓고 건들이지도 않고 그대로 집으로 들고 오기도 한다. 이러나 저러나 몸에 지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꽤 만족스러워진다. 재밌게 읽다가고 까맣게 잊고 방치해두길 반복하니 내가 여길 읽었던가 싶어서 처음부터 다시 읽다보면 몇달 전에 남겨놓은 밑줄과 메모를 보곤 내가 이 장을 읽었다고,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다가 그 위에 새로운 줄을 긋곤 한다. 딱 적당한 애정이 오간 책이다. 너무 흥미로워서 며칠만에 완독한 책도 아니고, 너무 지루하거나 관심사가 바뀌어서 완독하지 못한 책도 아니고. 그냥 딱 그만큼, 심심찮게 들고 다니고 또 방치해두고, 아마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까. 여행을 다니며 만나는 많은 정착지에서 ‘여행의 기술’을 읽다보면 알랭 드 보통의 시선을 따라 내가 여행 다니며 봤던 걸 공감하거나 의심하는 순간이 생긴다. 또 여행에 너무 들뜨지 말라고, 또 권태를 느끼지 말라고 말하는 순간이 생긴다.
3.
그래서 여행의 기술이 뭐라고? 읽다보면 여행의 기술을 읽는 건지 자기 계발서의 기술을 읽는 건지 혼란스럽기도 하다만. 그래도 이게 뭔 소린가 싶어도 읽다보면 흥미로워지는 것들.
기대에 대하여
행복을 찾는 일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면, 여행은 그 일의 역동성을 그 열의에서부터 역설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활동보다 풍부하게 드러내준다.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늘 제기되는 한 가지 문제는 여행에 대한 기대와 그 현실 사이의 관계이다.
내가 상상한 대로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동안 내가 상상했던 것들과 비교한다면 이것은 뜻밖의 사태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지속적인 만족을 기대하지만, 어떤 장소에 대하여 느끼는, 또는 그 안에서 느끼는 행복은 사실 짧다. 적어도 의식적인 정신에게는 우연한 현상으로 보일 것이다. 즉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수용하게 되는 짧은 시간이다.
잠깐 부루퉁해진 기분이 호텔 안팎의 모든 즐거움을 부수어버릴 힘이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면, 그것은 우리의 기분을 지탱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위스망스의 말에 따르면 데제생트는 “상상력은 실제 경험이라는 천박한 현실보다 훨씬 나은 대체물을 제공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여행을 위한 장소들에 대하여
“늘 여기가 아닌 곳에서는 잘 살 것 같은 느낌이다. 어딘가로 옮겨가는 것을 내 영혼은 언제나 환영해 마지않는다.”
화면들의 계속되는 호출, 가끔 커서의 초조한 박동을 수반하기도 하는 호출은 언뜻 단단하게 굳어버린 듯한 우리의 삶이 얼마나 손쉽게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냥 복도를 따라 내려가 비행기에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는 몇 시간 뒤에 우리에게 아무런 기억이 없는 장소, 아무도 우리 이름을 모르는 장소에 착륙할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가장 잘 만날 수 있는 곳이 반드시 집은 아니다. 가구들은 자기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도 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가정적 환경은 우리를 일상생활 속의 나라는 인간, 본질적으로는 내가 아닐 수도 있는 인간에게 계속 묶어두려 한다.
우리 경험에서 이제까지 무시해왔던 넓은 영역 위를 날아볼 수도 있다. 일상적인 일 속에서는 이르지 못했던 높이로부터 우리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일을 할 때 우리는 주위의 낯선 세계로부터 은근한 도움을 받는다.
이국적인 것에 대하여
우리는 사랑의 감정이 상대가 빵에 버터를 바르는 방식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고, 또 상대가 구두를 고르는 취향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기도 한다. 이런 자잘한 일에 영향을 받는다고 우리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세밀한 것들도 그 속에 풍부한 의미를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외국에서 이국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우리가 고향에서 갈망했으나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 바람에 흩뿌려져 이 나라 저 나라에 태어났다. 그러나 플로베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어른이 되면 상상 속에서 우리의 충성심이 향한 대상에 따라 우리의 정체성을 재창조할 자유를 얻는다.
호기심에 대하여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나? 무슨 생각을 해야 하나?
여행의 위험은 우리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즉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정보는 꿸 사슬이 없는 목걸이 구슬처럼 쓸모 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된다.
시골과 도시에 대하여
시인은 도시가 생명을 파괴하는 여러 감정을 만들어낸다고 비난했다. 사회 위계에서 우리의 지위에 대한 불안. 다른 사람들의 성공에 대한 질투. 낯선 사람들의 눈앞에서 빛을 발하고 싶은 욕망. 워즈워스의 주장에 따르면, 도시 거주자들은 뚜렷한 관점이 없기 때문에 거리나 저녁 식탁에서 이야기되는 것에 귀를 곤두세운다고 한다. 그들은 먹고살기가 편해도 자신에게 진정으로 부족하지도 않고 또 자신의 행복을 좌우하지도 않는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우리의 정체성에는 다소간 순응성이 있다는 원칙, 즉 우리가 함께 있는 사람 - 때로는 사물 - 에 따라 변한다는 원칙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일상의 사물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관습적인 무관심에서 벗어나 우리 앞의 세계의 아름다움과 경이를 발견하게 함으로써 초자연적인 것을 만났을 때와 유사한 느낌을 맛보게 하는 것. 사실 우리 앞의 세계는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보고이지만, 익숙함과 이기적인 염려 때문에 우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심장이 있어도 느끼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숭고함에 대하여
굴욕은 인간 세계에서는 항상 마주칠 수 있는 위험이다. 우리의 의지가 도전받고 우리의 소망이 좌절되는 일은 드물지 않다. 따라서 숭고한 풍경은 우리를 우리의 못남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익숙한 못남을 새롭고 좀 더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해준다. 이것이야말로 숭고한 풍경이 가지는 매력의 핵심이다.
눈을 열어주는 미술에 대하여
나중에 반 고흐는 동생한테 파리에서 아를로 이사 온 이유를 두 가지 댔다. 첫째는 ‘남부를 그리고’ 싶었던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이 남부를 ‘보도록’ 돕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능력으로 그런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심을 품었을지는 몰라도, 이 기획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믿음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즉 화가는 세상의 한 부분을 그릴 수 있고,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눈을 뜨게 해줄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우리가 관객으로서 어떤 화가의 그림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어떤 특정한 장면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특징을 그 화가가 골라냈다고 판단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퉁이는 예술가들이 그려주거나 글로 써준 뒤에야만 돌아보게 된다는 주장을 완벽하게 확인시켜주는 것처럼 보인다.
아름다움의 소유에 대하여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거기에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왔노라. 보았노라. 의미가 있었노라”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우리가 결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 곳에서만 자주 나타나거나, 계절과 빛과 날씨가 보기 드물게 조화를 이룬 결과로 나타나곤 한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소유할 것인가?
눈앞에 놓인 것을 우리 손으로 재창조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슨하게 관찰하는데서부터 자연스럽게 발전하여 그 구성 요소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게 되고, 따라서 그것에 대한 좀 더 확고한 기억을 가지게 된다.
사람들은 적극적이며 의식적으로 보기 위한 보조 장치로 사진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대체하는 물건으로 사용하였으며, 그 결과 전보다 세성에 주의를 덜 기울이게 되었다. 사진이 자동적으로 세상의 소유를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보는 것과 살피는 것 사이의 구별, 보는 것과 소유하는 것 사이의 구별을 흐려버린다. 카마레는 진정한 지식을 선택할 기회를 줄 수도 있지만, 어느새 그 지식을 얻으려는 노력을 잉여의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카메라는 사진을 찍음으로써 우리 할 일을 다 했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습관에 대하여
그렇다면 여행을 하는 심리란 무엇인가? 수용성이 그 제일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장소에 다가가게 된다. 어떤 것이 재미있고 어떤 것이 재미없다는 고정관념은 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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